Search results

'문장/소설'에 해당하는 글들

  1. 2021.01.11  이제야 언니에게

벚나무 아래서 제니가 경주 놀러 갔던 얘기를 하면서 '찬란한 무덤'이라고 했다. 제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단어를 말할 때 나는 혼자서 깜짝 놀란다.

오늘을 끝내고 싶지 않아서 일기도 끝내고 싶지 않다.

74

 

 

 

자기가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잘못하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이었다면, 원래 이런 일을 겪을 인생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108

 

 

 

우울과 무기력증으로 이불 밖으로 도저히 나갈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신발을 신은 채 오후 내내 신발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기도 했다.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기까지 한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제야는 무당벌레를 생각했다. 날개를 펼치고도 날지 못하던 벌레.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영원 같던 시간. 만지지 못할 것 같았는데 만졌고, 날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날아가던 무당벌레. 벌레도 못 만지면서 어떻게 실패 없이 사람을 죽이나 생각했던 그날 아침을.

158

 

 

 

 

유모차를 탄 아기들을 보면 두려웠다. 아기들이 자라서 무슨 일을 겪을지 어떤 사람이 될지, 말갛게 웃거나 항의하듯 우는 아기를 보며...

 

내겐 눈과 귀가 하나씩 더 생겼구나. 남들에게는 없는 조직이 뇌에 하나 더 생겼나보다. 눈과 귀와 뇌조직이 하니씩 더 생겨서,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볼 수는 없게 되었다.

163

 

 

 

 

이모는 내게 알려주면 안 되는 걸 알려준 거다. 참치나 방어의 맛뿐 아니라 아주 많은 부분에서, 내 입맛이나 취향이나 온기의 영역에서, 이모 때문에 나는 예전과는 결이 다른 허기를 느끼고 불행히질지도 모른다.

170

 

 

 

 

 

나는 절대로 이모에게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모에게는 늘 웃으며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모도 웃게 할 것이다.

174

 

 

 

 

제니가 제야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언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야는 제니를 밀어넀다. 왜 그렇게 묻지? 왜 모르는 척하지? 혹시 제니도 잊었나?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니까 제니도 잊어버렸나? 일부러 그러나?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그래서 나도 없애려고?

184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는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217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