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탐폰을 시도했다가 하나도 못 쓰고 다 버린 적이 있다. 이번에도 못할 것 같다고 내내 생각하다가 하필이면 생리와 겹친 내일의 프리다이빙 교습 때문에 불편함을 무릅쓰고 다시 시도해봤다. 됐다. 했다. 해보니까 진짜 별것도 아니다. 나는 삼십 년째 너무 많은 처음을 견디며 산다. 삶에 가닥이 안 잡히고 못 이룬 꿈만 많고 재주가 다양하고 그건 내가 대체로 다 애매하다는 말이라서, 그래서 나는 내가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자주 처음을 마주하며 사는 것 같다.
아무리 걱정하고 계획해도 앞날은 알 수 없다. 나는 그나마 내가 아는 삶의 어떤 면마저, 그러니까 그나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우울마저 까마득하게 잊고 완전히 바보가 돼 버릴까 봐 우울에서 아예 벗어나기가 두렵다. 그래서 스스로를 구덩이로 몰아넣는 경향이 솔직히 있다.
그래도 어떡해. 그러다가도 또 못 견디고 스스로를 자꾸만 구원해내는 나랑 살아야지. 사람은 사실은 자유 그 거대함을 두려워해서 덕질을 하거나 사랑으로 자신을 묶어둔다고 하지.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 될 수 있고(이것은 관점에 따라서 매우 한심한 상태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사주를 봤고 아니 이럴수가 올해 하반기의 점괘가 너무 좋게 나왔다. 그래서 나는 그 통계학의 응원에 힘입어 이 오월과 유월의 예정된 처음들을 뚜벅뚜벅 간다.
- 가보자고란 말 진짜 누가 만들었지? 마음이 뒷걸음을 치려 할 때 나도 모르게 가보자고라고 중얼거린다. 그럼 내 중얼거림에 의해 내가 용기를 낸다.
- 열등감은 여성의 감정이 아니다.
- 어제 눈 뜨자마자 쓴 기도문. 모든 것이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식으로 내게 찾아오기를. 인정을 갈구하지 않기를.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기를. 청결하고 단단하기를. 오래 노력하며 소망을 이루어가기를. 성숙하기를, 친구를 만나기를.
- 오늘 눈 뜨자마자 쓴 기도문. 사랑을 잘 알게 해주세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지구와 오래 함께하고 싶습니다. 즐겁게 자상하게 웃을래요.
- 나는 시간이 많대도, 쉬지 못하고 직장을 다녀야 하는 사람은 느리게 느리게 자기자신을 깨닫겠지. 하지만 느려도 괜찮다. 빠르거나 느린 게 우월하거나 찌질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긴 길 위에 함께 있다.
- 타인의 마음은 비밀번호가 없는 문 같다.
- 수영 한 번 했다고 몸의 신경들이 예민하고 단단해진 것 같아.
- 오랜만에 엄마 없을 때 엄마집에 가 봤다. 집이 개판이었다. 제때 버리지 못한 종이류, 플라스틱류, 동생에게 받아서 물에 꽂은 채 그대로 방치한 꽃들, 자잘한 음식물 등등. 항상 이렇다. 엄마는 못 버린다. 참다 참다 내가 버린다. 그럼 필요하지도 않았던 물건 때문에 우린 싸운다. 이번에도 또 어떤 짜증이 쏟아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화가 난 채로 물건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분류하고 정리한 물건들을 근처 쓰레기장으로 들고 가 하나하나 집어 던졌다. 그러며 생각했다. 엄마에게는 용기 내 자기 물건들을 버릴 수 있는 임계점이 있는 것 같다고. 어쩌다 그 임계점을 넘어서 이번에 엄마는 자신을 자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비닐을 비닐에, 종이를 종이에 차곡차곡 쌓으며 엄마에게 처음 저장 강박이 생긴 순간 엄마는 어디에 있었을까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다.
- 청소를 시작한 김에 고무장갑을 끼고 마당의 죽은 화분을 정리했다. 죽은 식물의 뿌리와 흙을 분리했고 작은 화분에 담겨 있던 이번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큰 화분으로 옮겨 담았다. 마른 식물뿌리 덩어리는, 내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다른 생명을 어서 안아 주라는 듯 쉽게도 들어났다. 흙이 빈 자리에 뭔가를 심으면 좋겠다고, 조금이라도 대문 여는 일을 기대하게끔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여행 가방에서 지난 대구여행때 숙소 주인분께 받은 해바라기씨를 꺼냈다. 씨앗을 물에 삼십 분 불려 두고 우산 꽁다리로 흙에 구멍을 내고 씨를 넣고 흙을 덮고 컵으로 물을 주었다. 화분을 햇빛 쪽으로 밀고 기분이 좋아서 박수를 쳤다. 해바라기가 꼭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