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또 생각. 내가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오래 연애를 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동경한다. 연인이라는 조건으로 남녀가 묶였을 때 으레 제공되리라 기대되는 것들이 아쉬운 고된 날들이 있다. 가져볼 뻔 했던 위안이 그립다. 가져본 적 없었다면 더욱 그립다.
결핍에 민감한 나는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보려 한다. 나의 결핍은 나의 일상에 많은 구멍을 낸다. 이 문제는 인간 본성에 의거한 일차원적인 결핍-성욕, 사랑 등-이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나는 이성애를 잘 할 자신이 없다. 오래도록 내가 부족한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해법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성애 결핍의 해결 방안이 이성애 실행이 아니라면?
사랑은 감정이다. 마법의 무엇이 아니다. 인간 문제의 거의 모든 해결 방안이 이것으로 제시될 만큼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가성비가 좋다. 그래서 비용이 들지 않는 그 감정이 유발하는 고효율의 생산성에 의지해서만 살 수 있을 만큼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태어나는 인간은, 빈약한 제도로나마 어떻게든 사랑을 이래저래 묶어 놓았다. 그러나 그건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라 치자. 과거의 나에게 외로움이 생존 방식이고 숙명이었으나 결국 힘을 기르고 그또한 감정의 하나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듯. 자립이 가능하게 된 염치가 있는 인간은 투자하는 것 없이 무보수의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럼에도 염치없이 내가 이성애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포기되지 않아서 스스로를 불완전하게 느끼게 하는, 이성애로 제공될 이상향이 무엇인가. 나는 넓은 어깨와 따뜻한 품을 떠올렸다. 내 손 쓰지 않고도 보장될 물리적 안전이 떠올랐다. 차후에 또 발생할지 모를 이성애라는 이벤트를 기대할 때, 나는 가장 먼저 그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가를 제 일의 기준으로 삼고 싶었다. 이것은 실체인가.
아니었다. 남성이라 해서 모두가 타인에게 제공할 잉여 보호 능력을 획득하는 건 아니다. 때로 그들은 작고, 혹은 바쁘고, 혹은 이해타산적이고, 혹은 가변적이다. 이 모든 건 여성 또한 가지는 특징이었기에, 결국 납득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여성에게 제공해주리라 기대되는 것 또한 가급적 남성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편이 훨씬 깔끔하고 자연스럽다. 남성이 여성보다 어쩔 수 없이 생물학적으로 세다. 그러나 그 힘이 여성에게 발휘될 때 공격적인 방향을 띠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생물의 본성에 반하는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러브유어셀프.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충족받을 밖에는 없게 된다. 다시금 물었다. 나는 나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가.
돈은 없다… 그렇다면 가진 것 중에 무엇을 활용할 수 있는가. 첫째로 나는 나의 인지적 능력을 항시 최대한으로 높여 살 수 있을 테다. ‘그녀가 비틀거리지 않았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홀로의 운명을 부여받은 인간이기에 필시 맞닥뜨리게 되는 외로움으로부터 철학과 자아 성찰을 수단으로 멀어질 수 있을 테다. 외로움을 사랑의 결핍으로 착각하는 자기연민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자 나는 늘 깨어 있을 수 있을 테다.
둘째로 여성의 생식 능력을 포기할 수 있을 테다. 분위기는 불시에 촉발되나 뒷감당은 홀로 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다. 우리는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 대체로 통계 속 세상 사람. 슈뢰딩거의 박스 속 실체가 확정되지 않은 우리의 미래 연인이라는 고양이는 지금도 10분의 9의 확률로 성관계시 콘돔을 착용하지 않을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셋째로 여성성을 포기할 수 있을 테다. 저기 저 여성이라는 대상이 나의 가용 범위 내의 에너지로도 복종되리라는 기대가 대부분의 범죄를 유발한다. 나는 힘이 부족하니 편견 안으로 숨을 밖에. 여성으로서의 특징을 벗음으로써 기대 외 대상으로 위장되길 기대해볼 법 하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헐렁한 옷을 입고, 그리고. 생각들은 이쯤 전개되다가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네가 정말, 이것들을. 다 할 수 있느냐고.(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