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싱글이다. 나도 그렇다. 살아본 사람으로서, 혹은 그 나이대의 흔한 중년 여성으로서, 혹은 20대 싱글녀를 사랑하는 50대 싱글녀로서, 엄마는 당연히 올 미래인 양 내가 시집간 뒤의 자기 일상을 상상해 말하다가도 또 갑자기 결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한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모든 대화가 결혼으로 귀결되는 나이인걸까. 방금도 같이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데 네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그렇게 없니? 너네 과에 남자가 몇 명 없었어서 그렇지? 습관적으로 하자있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혼자됨은 나의 무능의 논거가 아니다, 나는 하루하루를 치열한 사유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꽃노래도 하루이틀이지 아무리 얘기해도 되돌아오는 주제가 지겨워 그 뜻을 내비쳤다. 박원순으로 시작된 대화가 그년이 미친년이여 로 이어지고 끝내 또 이렇게 된 평소같은 날이다. 지겹다는 말에 혼자 생각하던 엄마는 그런다. 그럼 그냥 엄마랑 같이 살아.
엄마가 잘 해줄게.
그런 일을 당했으면 그 때 얘기해야지 이제와서 어쩌라는 거냐던, 그가 그녀를 끝까지 챙겨주지 않아서 하는 보복이라던, 너는 남녀관계를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할수 있는 거라던 그녀 안의 견고한 폭력의 스키마는 어떻게 여성 여유정과 딸 여유정에게 동시에 잘 해줄 수 있을까. 과거의 나에게 역시 적용됐던 순결해야만 하는 피해자의 논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말에 어쩔 수 없이 충족되는 기분을 느끼고. 그 안온함 속에서 또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미리 체념하다가도. 엄마가 자기랑 살면 진짜 잘 해줄 거라고 했는데 너 우리 엄마보다 나한테 잘 할수 있냐고 누군가에게 묻는 날이 온다면. 재밌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잘해주려 애쓸 사람도 나를 교묘한 폭력의 중첩구조 속으로 몰아갈 수 있다. 조금도 기만되지 않겠다는 나의 발악이 어떤 구조가 전부인줄만 알았을 이를 소외시킬수도 있고, 나 역시 끝내 어떤 보신주의적 구조 속에서 눈 감고 차라리 멍청하겠다고 다짐할 날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앎이 자유함을 완벽히 약속할 순 없을지 몰라도. 앎은 적어도 자유함에 “가깝고”, 그 명제를 증명함에 내가 찾아낸 딱 한가지 방법은 생각과 행동간의 간극을 줄이는 일이다.
그러니 무력해지다가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발악할 밖에. 행동함으로써 직접 증명해보이겠다는 각오가 나를 지탱할밖에. 아직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 지성의 필요충분요소를 갖춘다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행동하는 지성.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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