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당근과 채찍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당근이 보상이고 채찍이 벌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관념일 뿐이죠. 보상은 좋은 것이고, 벌은 나쁜 것이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것조차 관념입니다. 카르마라는 단어는요, 행동을 의미합니다. 카르마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게 행동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 그래, 일이 그렇게 됐어. 내 업보지 뭐. 라고 말할 때 보통 업보는 어떤 뜻을 뜻하나요? 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그 대가를 치렀다. 죗값을 치렀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죠. 네, 그렇다면 죄라는 것의 범위는 누가 정해주나요? 벌은 또 누가 주나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그 벌을 계속 받고 계십니까? 그래서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벌을 주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나는 왜 벌을 받고 있는 걸까요? 나는 왜 나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걸까요? 내가 저지른 내가 과거에 저지른 그 일이 잘못이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는 관념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한 번 생각해보세요 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어떤 나라에선 일부다처제가 합법이고, 많은 나라들에선 불법입니다. 어떤 나라에선 대마초가 담배보다 건강에 좋다고 더 많이 피우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굉장히 무거운 죄입니다. 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거죠. 우리는 이런 관념들이 없어도 내 내면과 근원과 강하게 연결하면 나와 타인과 세상에 이로운 일만 하고 삽니다 어차피.
하지만, 에고의 노예가 되면 이런 관념이라도 심어주어야 이건 죄야. 이건 나빠. 저건 악이야. 이런 관념이라도 심어주어야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고 삽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나는 여기 연결되고 법이 뭔지 몰라도 어차피 세상에 이로운 일만 하고 살게 됩니다. 제가 항상 왜 물을 마실 때 음식을 먹을 때 그 물과 식재료가 가진 기억 그러니까 이것들이 나에게로 오기까지의 그 여정에서 그 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된 역사에 대해서 늘 신경을 쓰면서 먹는다고 이야기하죠? 우리 몸 구석구석에도 당연히 우리 평생의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섯살 때 잠깐 스쳐 지나간 동네 친구들과의 일. 내가 여덟살 때 이웃 살던 아저씨가 한번씩 소리를 크게 지르던 일. 열 살이었던 어느 날 트럭 한 대가 빵빵거리면서 지나갔던 일. 이런 사소한 일들까지 다 저장이 돼 있죠. 그리고 영향을 미친 사건들은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친구와 다툰 일, 연인과 헤어진 일, 내가 가사랑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았던 일, 발표를 했는데 실수를 해서 망신당했던 일, 선생님이 나보다 짝궁을 더 예뻐했던 일, 그리고 그 사건들 하나하나로부터 그것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들은 우리 안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계속 비슷한 감정들을 일으키면서 그 기억을 가지고 비슷한 사건들을 재창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때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을, 운명, 팔자 등이라고 치부하게 되고.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나의 창조물이고 내 삶에 나타난 어느 하나도 내 의식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내 의식이 반영된 것이 내 삶입니다.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생으로부터 가지고 온 숙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절대적 존재가 숙제를 정해주어서 이걸 풀지 못하면 벌을 주는 게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이런 개개인의 영성의 문이 닫혀 있을 때 그러니까 우리 인류 전체에 이르는 상위 차크라가 닫혀 있던 시절에 영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지몽매한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요, 세상은 꼭 어떤 패턴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 같고 그래서 사람은 그 패턴을 알고 싶어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운명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믿게 되거나, 혹은 전생에 죄를 지으면 이번생에 갚는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거죠.
하지만 지금에 이른 여러분 한 분 한 분은요, 그 시절 모든 인류의 모든 영성을 굳이 숫자로 표현해 합한 전체보다도 지금 한 분 한분이 가진 파워가 훨씬 강합니다. 지금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영적으로 엄청 빠르게 깨어나고 있습니다. 자각하지 못해도요. 그러니까 그 옛날에 가졌던 영적인 믿음을 지금 고수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마치 지렛대를 활용해서 무거운 걸 쉽게 드는 법을 이미 익혀서 알고 있으면서 우리 조상님들이 무거운 걸 들 땐 두 팔을 이용해서 들었으니 나도 두 팔을 이용해서 들거야 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에요. 물론 저도 예전에는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것들을 강하게 믿었고, 전생에 죄가 너무 많아서 내생의 내가 고통스러운 거라고 강하게 믿고 살았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헤어나오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평생 나는 죗값을 치르면서 고통 안에 살 팔자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늘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날 싫어해. 친구들은 항상 날 왕따시켜. 남자들은 날 성적인 노리개로만 봐. 우리 가족 안에서 나는 비극의 씨앗이야. 난 팔자가 세. 난 다른 사람을 먹여 살라기만 할 팔자야. 도움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고,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내 팔자 내 운명이 아니고 내가 창조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요. 정말 허무하게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 사는 사람은 원하는 삶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싫다고 하면서 그 과거에 계속 매여 있으면 절대로 그 반대의 삶을 만들수 없습니다. 과거에 살면서 과거의 삶을 질질 끌고 오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삶을 계속해서 반복 창조할 뿐이에요. 삶을 바꾸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새로운 삶을 살면 됩니다. 과거는 놓아버리시고. 과거를 가지고 계속 업보, 카르마 이런 것들을 운운하는 이상 나는 반복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카르마라는 단어의 뜻이 행동, 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제가 방금 말씀드린 그 문장을 행동이라는 단어만 바꿔서 다시 말씀드리면, 과거를 가지고 업보나 카르마 같은 것들을 운운하는 이상 나는 반복된 카르마를 행하게 됩니다. 이해가 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나라는 존재를 알아차리고 내 마음 속 내 머릿속 그리고 내 행동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크고작은 말과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것이 업을 씻는 것. 그러니까 반복된 카르마를 끊는 것 내 안의 신성과 만나는 것 참된 삶을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질문들을 얼마나 많이 받아왔을까요? 정민님, 제가 전생에 돈을 가지고 죌르 많이 지었을까요? 제가 제사를 지내지 않아 우리 조상들이 저와 저의 이이들을 벌주는 걸까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물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시는 것이 질문자님의 카르마입니다. 삶은 환상이고 꿈이고 내 의식의 파편일 뿐이에요. 이 순간 과거를 놓아버리고 새로운 삶을 허용하면 나는 반복된 카르마를 끊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정확히 아십니까? 지금 이 순간 내 생각을 정확히 알아차리시나요? 하루에 깨어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깨어있다는 것은 100퍼센트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 내가 깨어있나요? 텔레비전을 볼 때는요? 운전할 때는요? 공부할 때는요? 아니요, 우리는 명상을 하면서도 100프로 우리 자신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100프로 인지하는 것은 이 우주를 10프로 이해하느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카르마를 극복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완전히 내 육체 안에 존재하고,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카르마를 알아차리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