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가족은 최초의 사회화기관이다. 인간의 발달에 있어 유전과 환경의 영향정도를 밝히는 일은 교육학자들에게 늘 뜨거운 감자이다. 유전과 환경이라는 각각의 영향변인은 일견 명확히 이분되는 듯 보이나, 가정에서 이뤄지는 인간발달 극 초기의 작용이 한 개인의 유전인자에 본성의 형태로 남음을 완벽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자식의 이야기를 성의껏 듣는 태도가 바른 가정환경의 초석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한 부모는 비교적 조작이 가능한 이 같은 정서적 환경을 구성해내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부족할지언정 화목한 환경에서 자식이 이를 실감하며 성장했다면 흔히 말하는 ’흙수저의 원망‘은 줄어든다. 생물학적 아버지의 지속적 음주와 폭력, 부부간 만성적 다툼, 원망의 자식으로의 초점화 등은 가정의 경제적·정서적 사회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놓치는 꼴이다.’ |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느 날 이런 글이 올라왔다. ‘흙수저 부모의 본질’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은 가정이 자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자극 중 한국사회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쉽게도 이뤄지지 못하는 정서적 위안의 기능을 지적한다. 글의 수위와 내용을 조정 및 재구성해 인용한다.
이 글에 댓글의 형태로 달린 수많은 간증은 현재 우리사회 속 가정들이 얼마나 병들어있는지 말해준다. 왜 가정은 최초의 사회화기관으로 순수하게 기능하지 못해왔는가? 그런 가정에서 사회화를 마친 한 성인의 본성 속에는 소위 말하는 ‘가정불화 인자’와 ‘우울유전자’가 필연적으로 각인되는가? 그런 요소를 끌어안고 사는 개인의 삶은 대체로 안온하게 사회화된 개인의 삶을 뛰어넘을 수 없는가? 삶의 긍정적 성취와 부정적 기억을 완전히 통합시키거나 아예 단절시키지 않는 이상 부모라는 주체로 서서 또 다른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해당 불행 인자의 대물림이 될 뿐인가?
나의 지난 삶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고찰하며 마찬가지로 병들었던 평범한 가정 안에서 살아남으려 분투해온 투쟁의 연속이었다. 해당 레포트에서는 상기 나열한 문제 의식들에 해법을 찾으려 시도하는 과정으로서의 본인의 삶을 시기별로 기술하려 한다. 그 시기라 함은 크게는 상담 전/후로, 상세분류하면 사춘기 전/사춘기 후/아버지 사망/상담 진행/현재라는 큼직한 사건들 위주로 분류되리라. 가족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으로 이루어진다. 시기별로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도 물론 달랐으나, 나 이외 구성원들과의 관계의 양상,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그에 잠정적으로 내려야 했던 해답은 각기 달랐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필사적으로 써 온 일기 형식의 글을 중간 중간에 인용하며, 레포트의 마지막에는 당장 구체화하기 두렵지만 결국 마주해야 할 ‘미래 가정’의 모습을 계획함과 동시에 끝내고자 한다.
2. 본론
사춘기 전의 내게는 주체적 의견이 없었다. 두 부모가 싸우지 않는 것이, 어머니가 괴롭지 않은 것이 나의 소망의 전부였다. 그 시기는 지금까지도 어머니로부터 ‘착하고 좋았던 시기’로 회상되곤 하나, 이면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이러한 가치판단은 여전히 나를 외롭게 한다.
당시 우리 가족의 문제는 ‘가정을 이룰 적절한 자질과 시기를 갖추지 못한 채 시작된 육아로 불거지는 다양한 관계에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당시의 가정 분위기를 묘사한 글을 첨부한다.
다섯 살 때인가 여섯 살 때인가. 집안은 어둡고 엄마는 기운이 없었다. 어리던 엄마는 자주 처연해지곤 했다. 그럴수록 내게 더 잘해줬다. 더 다정했다. 그래서 엄마가 다정한 게 나는 무서웠다. 뭔가 엄마에게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엄마에게 지금 나뿐이거나, 무언가 최선을 다 하면 엄마의 마음이 사르르 녹으리란 걸 나는 그걸 가능하게 한다는 걸 알아서 그랬겠지. 엄마의 기대가 담긴 일은 뭐든 헐떡이며 했다 엄마가 시킨 일을 할 때는 숨도 잘 안 쉬었다 1부터 3까지 숫자를 쓰는 것도 죽어라 했다. 그냥 늘 그렇게 해야 엄마가 삶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나는 보였다. 엄마가 내게 기대하던 것보다 더한 걸 보여주면 그만큼의 차이가 엄마에게 에너지가 된다는 걸 왜인지 나는 알았다. 죽어라 해 놓고 엄마가 나를 칭찬하면 얼떨떨했다. 내가 아이의 일을 대충 해도 당신은 계속 살 건가요. |
한 시기도 20대인 내게는 꽤 긴 시간들을 포괄하는데, 사춘기 전 시기 끝물 즈음 들었던 어머니의 고백은 오래도록 내 정서 건강상의 족쇄로 작용한다. 숨겨 두던 폭력 성향을 아버지는 신혼이 시작되자마자 드러냈고, 그에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결심하고 아버지로부터 피신해 있던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단 사실을 알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이후로 나는 내가 어머니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랐다.
때문에 당시의 내게 가정은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고 있는 집의 주인 같았고, 나는 그들에게 이유도 모른 채 호의를 제공받는 손님처럼 느껴졌다. 손님으로서 내가 할 일은 주인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주인 어머니의 감정을 보호하기, 예의 바르기, 크게 움직이거나 크게 소리 내지 않기 등이었다. 결속에 근거를 찾지 못하니 내게 주어지는 모든 투자는 부채감으로 쌓였다. 재才와 재災는 같은 운이라고, 점차 학업에 두각을 보이던 나는 자연스레 가정의 희망이 되었고 이후 학업에 대한 압박은 가정 내에서 점점 더 극심하게 정당화되어갔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혹은 조금이라도 밉보이는 게 싫어서, 혹은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18년 가족과 살아오면서 한 번도 반항다운 반항 해보지 못했고 고등학교 들어와서 최근 몇 년간은 정말 죽은 듯이 살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가족이 행복하냐면 썩 그렇진 않고 행복했던 때가 있었냐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없는 것 같다. 난 정말로 노력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눌러 참는 노력에는 결실이란 게 없는 듯하다. 끝이 없을 것 같다. |
사춘기 시기부터의 나는 이 지루한 시간들이 영영 끝나지 않을 거라는 피로감으로 지쳐갔다. 내가 점차 지시에 순응하지 않자 아버지는 사춘기 자체와 사춘기를 겪는 내게 폭언을 하고 어머니는 이를 방관했으나, 모든 시기를 돌아볼 수 있게 된 지금 그것은 단순히 사춘기로 치부해선 안 되는 우울 증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했으나 학교에서도 학교 폭력을 당했기 때문에 도피처는 없었다. 당시의 나는 가정이라는 개념을 내재화하거나 정의내릴 수 있을 만큼의 정서적 안정 상태를 갖지 못했고, 늦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돌보는 것이 유일한 가정에서의 관계이고 누나라는 호칭이 유일한 이름이었다.
이 때 불안과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을 뽑는 강박증인 발모벽을 비롯한 피부 뜯기 장애가 시작되었다고 추측된다. 진단을 받지는 못했으나 고등학교 들어서면서는 조울증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동생은 ADHD 경계선 검사를 받았으며,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름의 고충이 컸을 테니 이 시기 가족의 특성은 감정적으로 교류하지 못한 채 분리된 각자의 삶을 악착같이 견딘 것이라 설명될 수 있겠다.
그러나 생生이 가지는 에너지는 실로 놀라워,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고 밖에도 잘 나가지 못하던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부와 시험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다스리는 중이나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충남대학교에 들어갔으나 끝내 아버지는 내게 창피하다 말했다. 이 말이 여전히 아쉽게 남는 것은, 점차 현실 세계에서의 삶에 적응해가며 성과를 내려 하던 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그가 나의 대학생활 초반에 죽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행복한 일상을 꾸려 보려 하던 나의 인생 계획은 도로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전부 맞춰졌다. 조금만 지체하면 어머니도 나를 떠나리라는 불안이 근래까지도 만연했었고,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돌볼 줄 모르던 미숙한 정서발달 상태에 조급함과 뿌리 깊은 열등감, 장학금을 위한 바쁜 일상, 그리고 고시 공부로 인한 불규칙한 섭식과 수면 등이 합쳐져 나는 끝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우울을 경험하게 된다.
늘 그렇듯이 아침을 먹이고 등교하는 것을 도우며 집안일 좀 하라고 농을 걸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어린애는 나를 닮아 말만 잘 하지 실제로 뭐라도 시키려면 구시렁구시렁, 하는 일도 별로 없다. 야자 끝내고 돌아와서 마당도 쓸고 쓰레기도 버리고 엄마 발도 주물러드릴 테니 아침만 좀 누나한테 맡긴다길래, 엄마 누가 자기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해, 했다. 그랬더니,
- 그게 아니라. 엄마는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야.
너는 언제 이렇게 자랐니. 누나 때문에 아빠가 죽은 거라고 울며 목을 조르던 너는 변하겠다 말도 없이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라 버렸니. 누구도 책임져주지 못하는 네 불안과 혼란을 너는 어떻게 끌어안았니. 어떻게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니. 세상에 사랑할 사람도 사랑받을 사람도 없어 그애의 누나라는 것 하나만이 나를 설명해주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영영 나의 타자인 줄만 알았던 아이는 무관심 속에서도 홀로 자라고. 한 주체가 되어 제 몫의 사랑을 요구할 줄 알고. 이제는 사랑을 할 줄도 알게 된 건지. |
당시의 가정은 서로의 역할이 혼재되고 혼선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졌으니 남동생에게 전이된(스스로 부여한 건지 알 수 없다) ‘가장역할 기대’는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폭력성과 강압성을 이끌어내어 스스로의 불안과 기대 중압감을 구분하지 못할 때 그는 종종 물건을 부수거나 나를 때렸다. 어머니는 기존에도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에 역할 변화를 크게 실감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해소하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나의 분노는 방향을 잃고 어머니에게로 전이되었던 것 같다. 감정을 다루는 태도가 매우 경직되어 있는 어머니는 가족 중 유일하게 수용적 성향인 내가 생기를 잃어 정서적 가장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함에 따라 의지할 대상을 잃고 초조해하며 처음으로 폭력 성향을 드러냈다. 모든 요소들이 톱니를 굴리듯 악순환했다.
그때 즈음의 나는 살고자 무엇이든 했다. ‘우울하지 않은 아침을 맞이하려면 일어나자마자 미지근한 물을 마셔라.’ 라는 문장 하나가 나를 구원하는 양 며칠을 매달린 적도 있다. 그렇게 대전광역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에서 일 년여의 상담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성의껏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다. 나아지려고 상담을 하는 건데 상담이 진행됨에 따라 고구마 줄기 캐듯 떠오르는 잊어야만 했던 기억들에 오히려 더 힘들어지고 있다고 느낀 적도 있고, 나를 이토록 응원해 주는 이 한 사람도 없이 내가 앞으로 다시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나아지기를 거부하고 상담을 여러 번 미루기도 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그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칭찬 일기를 쓰던 어느 날은 내가 이렇게 많은 칭찬거리를 가져도 되는 사람이라면 왜 나는 그런 일들을 당해야 했는지 납득되지 않아 상담 선생님을 증오한 적도 있다. 그때에 몸도 이유 없이 아팠다. 매일 온 몸의 근육이 쑤시고 괴로운데 딱히 병명을 붙일 수 없었다. 나중에야 적기에 인지하고 치료하지 못한 상처와 그로 인한 신체적 경직이 심리 치료를 하며 치유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드러나며 해방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발견은, 내가 실수가 아니라 ‘사랑해서’ 태어난 딸임을 깨달은 일이다. 단번에 이해되지 않아 선생님의 말을 곱씹던 밤 그것이 납득되는 순간 발 디딘 땅에 퍼지던 ‘그렇다면 나는 살아 있어도 된다.’는 안정감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점차 힘을 기르며 지루한 가정불화의 굴레를 조금씩 끊어보려 노력했다. 선생님께선 ‘어머니는 자신이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도 모르고 도로를 달려오고 있고, 동생은 뭐가 오는지도 모르고 그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유정씨 눈에는 그 차도 그 행인도 보이기 때문에 유정씨가 막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두렵고 억울했지만 용기를 냈다. 죽는 것보다야 진실을 마주하는 게 나았다.
나는 차마 엄마가 한 마디라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는 마음이 담긴 말을 할까 두려워 25년을 그 관계의 겉모습만 빙빙 돌며 살았어. 알고 있었을까? 사실은 너무 물어보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사랑하지도 않는 딸을 25년이나 데리고 키울 리가 없는 거지? 정말로 사람이라서, 물건이어야 버렸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산 게 아니지? 엄마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내게 뱉은 많은 모진 말들을, 이제는 그만 곱씹으며 매번 새로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런 말을 마구 뱉어 놓고 순간 돌아서서는 울고 있는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것은, 나의 존재를 멸시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는 그런 말에 상처받아요. 사과 받고 싶어요.’ 라고 말하질 않아서 몰랐으니까 그랬던 거지? 나에게 절대적이며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말이라도, 내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이라면 듣고 나서 잊어버려도 되는 거겠지? 내가 아주 좋지 않던 순간에 엄마 뱃속에 생겨났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인생에 빚을 졌다고, 그러니 엄마가 엄마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게 하려면 내가 성공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자라거나 무능한 것은 그저 나 스스로에게 조금 불편할 뿐 그 자체로 엄마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니며, 그런 아이라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라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엄마는 야무져서 엄마 스스로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이 세상에 충분히 많이 있고, 나도 다소 이기적일지라도 나만의 행복을 찾아 나서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도 되는 거겠지? 그리고 어차피 나는 이제, 엄마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혼자 당당하게 해 나가며 살아야 하는 나이가 된 거지? |
그리고 내 인생의 유일한 위안이어서 평생이라도 하고 싶던 상담 중의 어느 날 나는 끝내 내가 더 이상 우울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야 우울로 도피하지 않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지금이다. 여전히 삼 일 정도 애써서 건강하게 살면 오 일은 습관적으로 우울에 빠져드는 기복 있는 일상을 멱살 잡고 억지로 끌고 간다. 사람을 만나고 규칙적으로 건강하게 지내고 싶어 다시 학교로 가겠다는 선택을 했는데 코로나로 도루묵이 되어 허무하기도 했고, 괜찮아졌다고 여겼으나 가정교과의 특정 계열 내용에 여전히 태연할 수 없어 괴롭기도 했다. 엄마 동생이랑은, 싸울 때는 당연히 도로 다 포기하고도 싶지만, 전례 없이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별거 없는 지루한 날들 속에서 서서히 함께 강해지고 있다. 이번 학기 수강과목이었던 가족학과 부모교육을 배우다 ‘내 어린 날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던 마음이 든 날에는 이런 일기도 썼다.
언제나 배우기 괴로운 주제. 부모교육과 가족학이라는 과목으로 이렇게 삶과 정통으로 맞닥뜨려 버렸다. 사이버 강의이다 보니 남 눈치 안보고 눈물 줄줄 흘리면서 수업을 듣다가… 그래 학문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자유하지 못하게 하던 삶의 미해결과제와 비밀들을 피할 수 없이 고민하게 하고 끝내 통합되게 하는 것이 배움이다. 단지 교사가 되기 위한 경로로 쓰이고자 가정 교과와 내가 만난 건 아닐 거야.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배우니까, 아마도 앎은 자유함이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가장 실생활에 밀접한 학문을 배우며 끝내 그것을 사회적 성공으로까지(교사되기와 높은 수준의 생활지도) 연결시키고 높은 밀도로 자유해질 것이다. 앎은 아마도 자유함이 아니라, 응당 그러하다. 그런 확신을 스스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
3. 결론
이렇게, 나는 아직 나로 바로 서는 중에 있어 내가 부모나 아내로 있는 가정과 같은 이상을 꿈꾸기는 버겁다. 다만 이것이 부족하고 저것이 부족해서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늦었다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배웠듯이, 부모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자아를 실현하려는 성인에게 당연한 거니까. 인지 능력과 노력으로 사랑이 다 감싸주지 못하는 삶의 많은 구덩이들을 메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 나는 또 가정교과를 배우고 익힐 것이다. 행동하는 지성.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