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어떤 학생 중에 이런 학생들이 있었죠.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같이 남해안 바닷가에 놀러 갔었던 경험을 얘기하는. 저기 내가 걸어가고 있고 누구를 만났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멀리 구름이 떠 있었고. 엄마 아빠가 사건의 중심이죠. 엄마 아빠가 매운탕을 끓였는데 맛있었고... 이렇게 씁니다. 또 어떤 학생은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 경험이라든가. 행복했던 어떤 순간들이 사람마다 있어요. 그런데 학생들에게 처음 그것을 써 보라고 하면 학생들이 대부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씁니다.

  그런데 제가 오감을 이용해서 쓰라고 하면 학생들이 처음에는 어려워하지만 곧 적응하죠. 어떤 거냐면 이런 거에요. 멀리 바닷가에 갈매기가 떠 있는데 갈매기가 끼룩끼룩 우는 소리를 들었고 바다에 들어갔을 때 물이 종아리에 닿는 느낌이 차가웠고.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니 해초가 내 발을 핥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내 동생이 와서 나를 물에 집어넣었고 그때 마셨던 바닷물이 아주 짰다는 거에요.

  학생들에게 이 글쓰기를 시켜 보면 학생들이 아주 몰입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나중에는 그때 경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려요. 그냥 시각을 이용했을 때와는 다릅니다. 이렇게 감각과 경험이 이어지는데요. 이 경험이 예술 행위, 글쓰기 같은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감각을 더 일깨울 수 있어요. 그래서 이 글쓰기를 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물어 보면 그 뒤에는 일상을 살아갈 때에도 다섯 가지 감각을 다 떠올린다는 거에요.

  이렇게 감성 근육을 조금 더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육체 근육이 발달한 사람은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기초대량이 높아서 살이 잘 안 찐다고 하잖아요. 감성 근육이 발달한 사람 역시 더 많은 것을 느끼면서도 정신이 그렇게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잘 느끼는 건 그렇다면 왜 중요할까요. 안 느끼면 되잖아요 바쁜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잘 느끼는 사람은 남의 의견에 잘 휘둘리지 않아요. 자기 느낌이 있잖아요. 이 느낌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식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평생 음악을 듣고 살아온 사람이 있으면 자기 취향이 생기죠.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 별점 보고 콘서트 가고 그렇지 않아요. 저 역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고를 때 별점이라든가 리뷰를 거의 보지 않아요. 한 작가의 책을 읽고 그 작가가 저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것을 기억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그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내면 그것을 삽니다. 내가 정말 느꼈기 때문에 훨씬 더 강력하게 그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와인을 전문적으로 테이스팅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의견을 듣고 와인을 고르지 않겠죠. 그런데 그 작가가 저를 실망시키면 역시 그것은 제 몸에 제 육체에 새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쌓이면 저는 그것을 '육체의 데이터베이스'라고 부르는데요. 자기 느낌의 데이터베이스가 풍부한 사람은 대단히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집단의 의견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익숙한 것, 즉 의식주에 대한 것을 너무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지나친 경우에는 살기 위해 먹고, 정욕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런 사람들은 일상의 대부분이 추락하여, 뭔가 고상한 삶이란 자신과는 다른 머나먼 세계에 있는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생의 토대를 확고히 지탱하고 있는 의식주라는 생활을 향해 진지하고 흔들림 없는 시선을 쏟아야만 한다.

  더욱 깊이 사고하고, 반성하고, 개선을 거듭하여 지성과 예술적 감성을 생활의 기본에 드리워야 한다. 의식주만이 우리를 살리고 현실적으로 이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니체, 방랑자와 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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