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이제 경기는 끝났습니다. 여러분에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지만, 문둥이에겐 이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문둥이도 축구 같은 걸 할 수 있구나 하는 조그마한 사연이 수만 나환자에게는 벅차고 갈피 잡을 수 없는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에 일어날 그 벅찬 일들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가 없을 겁니다.…”
Ⅰ. 천국의 원형
‘당신들의 천국’은 1974년 『신동아』에 연재된 이청준의 장편소설이다. 이청준은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 「잔인한 도시」 등의 대표 작품을 두었다. 그는 그가 경험한 현실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 본질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탁월한 눈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39년 출생, 65년 「퇴원」으로 등단, 7~80년대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의 창작 열정에는 시대 배경도 큰 요소로 작용한다.
복도훈 교수님의 수업인 소설교육론에서 이청준의 소설은 총 두 번 다루어진다. 나는 그 전 독서 과제였던 「이어도」를 탐구하다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그의 작품이 가진 개성에 압도되어 당신들의 천국을 함께 읽어보았다. 그의 작품은 그간 복도훈 교수님과 함께 탐구했던 다른 작품들보다도 작가의 사상과 그로부터 파생된 작품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전반에 깔린 모호성과 환상성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서사학을 배우기 전의 나로서는 납득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그래서 그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전부 '이 작가의 개성'으로 뭉뚱그려 이해하려 했던 나름의 계략이 오히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문둥병 환자들이 사는 격리된 섬에서 시작한다. 정식 명칭은 한센병. 실제로는 전염률이 극히 낮고, 지금은 완치가 가능하게끔 약이 개발되어 일반 피부질환자와 다름없이 치료받는다고 한다. 이 병이 과거에 사람들로 하여금 공통된 공포와 그에서 비롯된 소문과 편견들을 불러일으켰음은 다양한 한국 문학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문둥병, 나병이라 함은 문학에서 당연히 비극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쓰임직하고, 그렇기에 소설이 첫머리서부터 '이 소설은 나병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고 시작했다면 나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굳건한 눈을 가진 직업군인 조백헌의 시선으로 문을 연다. 그는 외지인으로 섬에 처음 취임되어온다. 마치 섬에 대한 어떤 사전 지식도 없는 우리 독자들처럼, 그는 한참 동안이나 섬의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한다. 화자 특유의 딱딱하고 억압적인 말투와 도무지 살아있는 것 같지 같은 환자들의 분위기는 합해짐으로써 더 큰 그로테스크함을 자아내어, 소설 초반부는 정신병 환자들의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 소설 「죽은 자들의 섬」과 같은 느낌을 준다.
왜 그들은 그렇게까지 섞이지 못하는가? 소설이 내내 조백헌의 시선으로 서술되니 이 관점은 자세히 후술하도록 하고, 섬의 환자들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하겠다. 격리된 섬의 이름은 ‘소록도’이다. 유난스럽게도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소설 내에서 살아있는 섬 같은 느낌을 주었던 소록도는 실제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위치한 섬이다. 여기서 소설과 현실의 이음새가 생긴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 해서 소록도라 이름 붙여진 이 섬에는 실제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고, 아직도 약 70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의료진·봉사자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조백헌 이전의 동상이었던 주정수 원장의 원형이 되는 인물도 실존하며, 그가 살해되었던 사건도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모티브적 인물의 이름은 수호 마사토라는 일본인 원장으로, 그는 조선인 환자를 멸시하고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가 하면 자신의 동상을 억지로 세우도록 하는 등 가혹 행위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청준이 세운 섬에서의 일과 비슷하다. 환자들을 지배하는 거부감과 무력감-조 원장이 아무리 무너뜨려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발동하고 마는 방어 기제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청준은 왜 자신이 세운 소록도와 현실의 소록도 두 세계의 경계에 서서 천국을 향한 긴 여정을 글로 풀어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결국에는 완성되었는지도 명확하지 못한 아픈 천국을. 이는 이청준이 작품 활동을 하던 시대 상황과 다시 이어진다.
당신들의 천국은 1976년 발행된다. 작가 나이 37세의 일이다. 한국의 70년대는 새마을운동과 유신헌법에 따라 국가 주도적인 권력의 억압이 극도로 치닫던 시기였다. 60년대에 청년의 나이로 4.19 혁명, 5.19 군사쿠데타 등등의 굵직한 변화의 역사를 겪어낸 이청준은, 최인훈, 김승옥 등과 함께 4.19세대라는 명칭을 얻는다. 4.19 세대는 ‘청년기, 특히 대학 시절 4.19를 체험했고, 식민지 시기 이후에 교육을 받아 한국어로 사유하고 그 사유를 한국어로 기록할 수 있었던 최초의 한글세대’ 라는 임무성을 내포하는 이름이다. 그렇게 시대에 대한 관심을 타고난 운명인 그였기에 그는 개인의 사상이 탄압되던 시대에도 끊임없이 바른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이런 가치관은 당신들의 천국과 비슷한 시기에 쓰인 「언어사회학서설 연작」에서 드러난다.
총 네 편의 연작 중 두 번째인 <자서전들 쓰십시다> 의 작가 노트에서 그는
“자기 자서전으로 그가 살아온 시대를 정직하게 증언하고, 자기 자서전으로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참회를 행해보이는 것은 그것을 읽는 우리 독자들이나 집필자 자신의 삶을 위하여 다 같이 값진 기여와 보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한다. 그는 끊임없이 사회와, 개인이 사회에 건네는 말의 관계를 탐구한 작가였다. 70년대 전체주의적 사회에서 언론과 문학의 자유는 억압되고 시대를 ‘정직하게’ 증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 잃게 된 순수성을 안타까워한, 그럼에도 어떻게든 우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려 했던 그의 노력이 당신들의 천국으로 집약되어 탄생한 것이 아닐까.
Ⅱ. 천국은 완성될 수 있을까?
소설은 내내 조백헌의 시선을 따라 간다. 나는 기필코 천국을 건설하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에 감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지는 곧 나의 의지가 되어 그가 고군분투하는 동안은 나 자신도 곧 소록도의 낙원을 위해 돌을 나르는 원장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와 내가 분리될 때가 있었다. 이상욱, 황 장로 등이 건네는 참언에 조백헌이 자신의 동상을 의심하고 흔들릴 때였다. 문둥병이 이제는 완치가 가능한 병이라는 배경 지식을 가진 채 소설에 임해서일까, 소설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후자가 더 강력한 원인이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들의 낙원이 완성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Utopia는 ‘이상적이나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한다. 낙원의 다른 명칭이라 볼 수 있는 Elysium에는 공통적으로 ‘죽은 후에’ 도달하는 곳 이란 의미가 포함된다. 그러나 나는 조백헌과 내가 바라마지않았던 그 낙원을 미완된 채로 남겨둘 수가 없었다. 소설 곳곳에서 그들의 천국이 실현 불가능함을 내포하는 단서를 끊임없이 제공해도-그래서 읽는 내내 ‘이 작가는 대체 뭘 하자는 건가’ 하며 많이 답답해하기도 했다-내 안에서 그 천국을 완성시킬 서사를 이어가야 한다고, 방대한 서사 속에서 천국이 완성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작고 작은 단서를 내가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병자의 굴레 속에서 환자들은 마지막 장이 덮인 후에도 죽은 듯 살아갔을까? 주정수의 핍박과 고문 속에서 그들만의 생명까지 탄생시키고 만, 어떤 충격적인 배반 끝에도 다시 ‘사람’으로서의 삶을 꿈꾸며 끝끝내 사람을 신뢰해보고자 노력했던 소록도 문둥이들의 삶은 그렇게 안일하게 이어져온 것이 아닐 터였다.
궁극적으로 이 소설의 제목이 「당신들의 천국」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천국은 긴 소설의 끝을 함께 한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 현실이 아무리 비참해도, 이청준이 작가로서 제시할 수 있는 현실과 희망의 복합체가 여기까지라고 해도, 낙원의 존재가 그곳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뿐 도달한 후에는 또 다른 이상을 찾아 각기 흩어지고 말 것이고 그렇기에 그가 열어 놓은 결말의 정도가 최선이라 해도, 이후의 천국 문을 더 활짝 열거나 그냥 닫아버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 조백헌과 문둥이들은 당장이라도 다시 돌을 나를 준비가 되어 있기에 내게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은 지극히 타당하다.
천국의 기반이 될 수 있음직하다고 생각하여 내가 주목한 소설의 소재들은 첫째 고개를 든 득량만의 물길, 둘째 서미연에게 경계를 허물어가는 윤해원, 셋째 다시 돌아온 조 원장과 그에게 남은 무위(無爲)함이다.
소록도가 실재한다면 그들이 염원했던 오마도는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이 사업은 엉뚱한 곳에서 좌절의 고비를 맞았다. ‘문둥이들에게 땅을 내 주고 그들과 이웃이 될 수 없다.’ 는 인근주민들의 강한 반발과 이 지역 출신 공화당 국회의원 신 아무개(작고)씨의 견제가 그것이었다. 끝내 그는 예편과 함께 병원장 직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의 천국’ 건설 사업이 중단된 것은 물론이다. 그때까지의 공정은 투석 작업이 85%, 갑문공사가 90%로 제방은 거의 완공 단계에 와 있었다.…
“…간척사업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평가를 하는데 우리는 80% 공정을 이뤘다 했다. 하지만 당국은 60%로 저평가했다. 바닷물을 막아 그 안에 흙을 깔고 잔디만 심으면 되는 순간이었다.…”
끝내 공사는 완료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앵글 속 지리학’에는 득량만 간척지가 1937년에 완공되었다고 소개한다. 소유권은 물론 육지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바람이 끝내 실현되었음에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공사에 참여한 최금주(77)씨는 “어떤 길을 가더라도 죽기 전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흙을 퍼내고 맨몸으로 바위를 나른 이들의 대부분은 섬의 납골당인 만령당에 잠들어 있다. 섬을 나와 육지에서 자신들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걸고 뛰어든 간척사업에서 이들이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미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섬사람들의 인권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규정했지만 그 온당한 보상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싸워 이기는 것은 당장의 우리들에게도 어렵다. 문둥이들은 떨어져나가는 손으로 물속에서 길을 끌어올리는 일을 거의 완성 단계까지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완성을 끝내 방해해버린 것은 누구인가? 섬 공동체의 최초의 성취이자 편견의 벽을 허무는 가장 큰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간척 사업의 마무리를 망쳐 버린 것은 다름 아닌 몸 성한 우리들이다. 변화가 사소한 것으로부터 촉발함을 일련의 정치적 격동을 겪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소하지도 않고 사소할 수 없었던 그들의 큰 희망을 자칭 정상인인 우리가 빼앗아 놓고 ‘천국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하며 이야기를 끝내 버린다면 이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얼마나 무책임하고 안일한 자세인가. 소록도라는 곳이 존재함을 알아 버린 우리가 그들의 억울함을 풀고 함께 사는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무언가 행동하기는커녕, 천국이 완성될 수 없음을 이론적으로 탐구만 하고 끝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들’의 천국 속에 사는 이기적 인간 군상의 모습이리라.
혹자는 서미연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윤해원과 결혼했기에 그들이 촉발할 천국도 깨끗하거나 완벽치 못하리라고 말한다. 글쎄, 완치 가능한 병을 두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도 전 레포트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이거나 비합리적 상념(irrational belief)이다. 윤해원이 그 자신의 콤플렉스와 방어 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붙들고 있는 연분홍의 열병이라는 미신은 너무나 연약한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이제 구시대적 유물과 같은 취급을 받고, 온갖 ‘~용기’라는 제목이 붙은 심리학 서적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지금은 아들러 심리학의 시대이다. 서미연이 미감아 출신이라는 본질이니 그 본질을 숨긴 것이 갖는 한계가 어쨌느니 하는 점은 일단 차치하자. 천국이 ‘당신들’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로 큰 이유로 작용하는, 나병 환자들의 세상에서 보내는 편견으로부터 비롯한 뿌리 깊은 자격지심. 이것 역시 결국 ‘육지사람’인 우리가 힘을 합쳐 개선토록 노력해야 할 문제이다. 나는 국어 교육을 복수 전공할 때부터 ‘어차피 나는 임용고시 못 붙을 거야.’라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내가 교사가 되어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커질수록 그 막연한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런데 작년에 우리 과 13학번 선배 두 분이 국어 임용고시를 초수에 붙었다. 국어 전공자가 합격하는 것을 처음 본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부랴부랴 내 인지 구조를 수정해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그릇되고도 비생산적인 인지 구조를 갖게 된 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초등임용에 비해 접근성이 턱없이 높은 중등임용과 그보다도 더 높은 접근 요인으로 작용하는 모국어라는 특성, 국가 재정 부족으로 정년퇴임하지 못하는 원로 교원들, 매 해 치솟는 경쟁률…. 이런 사회적 구조와 나의 스키마가 결합되었기에 나는 그런 그릇된 신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락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나의 노력이다. 하지만 지금도 희망을 가지지 못한 채 공부하는 전국의 많은 국어 예비 교원들의 인지 구조를 전체적으로 바꾸려면 사회의 노력도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병 환자들이 가진 스스로에 대한 편견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조백헌은 자신의 아집으로 천국 건설 계획을 시작했지만 결국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가 실현할 수 있는 환자들과의 최대한의 평등을 이루어 섬으로 다시 돌아왔다. 조백헌이 주도했던 천국 건설이 ‘당신들’의 천국이어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고, 그 가장 큰 이유가 극복될 수 있는 명확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조백헌과 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적 차이. 조백헌이 앉은 지도자의 자리는 나병 환자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병 환자들의 손으로 뽑은 나병 환자로서의 영웅이 아닌, 외부에서 어느 날 굴러 떨어진 타인이다. 병원장과 환자라는 사회적 권력 차이와 더불어 조백헌은 ‘정상인’이라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조백헌이 섬을 떠나기 전에 건설하려 했던 천국의 모습도 병원장이라는 편리한 지위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투를 벗어던지고도 다시 섬으로 왔다. 혹시 완벽히 평등한 천국을 위해 그 역시 환자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이 든다면 지나친 것 아닐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섬에는 그렇게 섬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결국 그런 선의, 혹은 광기, 혹은 집착이 어찌되었던 변화를 불러오리라고 생각했다.
Ⅲ. 우리가 사는 천국
「당신들의 천국」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시사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함축성을 지닌다. 몰락한 독재자와 그의 하나뿐이었던 동상, 새로운 세계를 건설코자하는 새 지도자, 그리고 그를 견제하는 이상욱과 같은 기존의 인물들. 이청준의 선구안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깊게 생각해보게 된 것은 천국 건설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였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절대적 약자는 없다. 내가 지금 외면하는 누군가의 아픔은 돌고 돌아 내게 다른 아픔이 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이슈를 들 수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 인권을 둘러싼 페미니스트들과 역차별을 주장하는 ‘평등론자’들의 대립이 가장 뜨거운 감자였으나, 군대 내 동성 성관계로 징역형을 받은 A대위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다시금 한 사회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 수많은 천국과 수많은 지옥을 실감하게 한다. A대위는 지옥에 떨어졌다. 징계를 받기 전부터도 아마 그의 생은 완만한 지옥이었으리라. 그가 ‘지옥행을 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한 보편적인 사랑을 하는 우리는 그의 기준으로 천국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의 주재료로 보편타당한 찬양을 받는 사랑이란 소재는 왜 동성애자들에게만 높은 천국의 문턱을 제공하는가? 그 문턱은 누가 세워 두었는가? 조백헌이 나병 환자는 될 수 없듯이, 애초에 이성애자인 우리가 동성애를 두고 이런 논박을 하는 것 자체가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어쩌면 건설해야 할 것은 ‘완벽한 천국’이 아닌 누구에게나 똑같이 지옥이거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천국인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너뜨려야 할 것은 나 자신이 영원히 천국의 편에 머물러 있으리라는 안일한 이기심으로 세워진 동상일지도 모른다. 극단적이지만 그렇다. 나는 개별적 아픔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모두에게 똑같이 안타까운 지옥의 기억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게 가능함을 세월호 사건 때 보았다. 그리고 그때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아도. 그분들의 슬픔을 조금 더 행복한 내가 덜어 갖고. 그들이 비난받을 때 같이 견디고. 그렇게 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평등해진다면, 언젠가 내 인생에 닥칠 불평등에 나름대로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백헌이 지위를 버리고 소록도로 돌아오는 모습은 이런 나의 가치관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움을 알고서도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함께 구원되기 위해, 자신의 처지를 자진해서 어떤 지옥으로 빠트려버린 그의 결단력이 천국을 야기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과정은 이상욱과 황 장로를 마주하는 순간만큼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난 후 내 안에 생긴 확신은 노력해서 지어지지 못할 천국은 없고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간신히 발이라도 걸치는’ 날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냉소주의자는 사실 그 안에 가장 두려운 희망을 갖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현대인들에게 ‘당신들’의 천국 이라는 고함이 주는 메시지는 다양한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